나는 나름대로 생각하기를 그렇게 야단스럽게 조기교육을 하지 않았다. 아들은 아파트 단지 내 유치원 교육을 마치고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집에서 매우 가까운 일반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1학년을 마친 아들은 예고에 편입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렇게 특수 목적고에 지원한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은 입장에서 고민이 많았다.
학교 담임 선생님 하고 상담도 하고 아들의 의중도 들었다. 아들은 일단 편입 시험을 보고 안 되면 다시 인문계 고등학교로 돌아 올 생각을 하였다.
이후 절차를 따라 면접을 보고 합격을 하였다. 후회하지 않겠느냐고 물어보니 후회 않는다고 하였다.
예고 편입이 시작되었다. 편입생이다 보니 교복도 없이 한 학기가 지나갔다. 부모 된 입장에서 혹여 또래 간에 좋지 않은 영향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교복 판매점에서는 일반 고와 달리 예고는 학생수가 적어 여유분을 많이 주문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조금 시간이 지나서 교복 바지와 셔츠는 사이즈가 커 수선 집에서 수선을 해서 입혔다. 지금 기억으로는 상의는 졸업 때까지 못 입은 것 같다.
사립학교인 예고는 일반 고교와는 달리 학비가 너무 많은 차가 있었다. 거기에 집에서 거리가 멀 리 떨어져 있어 고통비, 수업료, 학원비, 과외비, 미술 도구등 벅찬 학비가 요구되었다.
시즌마다 대회에 참석하거나 출품 비도 많았다. 아들은 아는지 ~~ 나는 대회에 참석하여야만 대학 진학에 도움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대상을 타거나 한 기억은 없는 것 같다.
특수 목적고등학교에 대한 각별한 지식이나 관심이 많이 없었던 나는 많이 혼 란스럽고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아들은 많이 힘들고 어려웠겠지만 무사히 예고를 졸업하고 국립대학에 진학하였다.
국립대학이다 보니 등록금이 저렴하였다. 아들 위가 딸인데 딸은 사립대 예술 대학이라서 한하기 등록금이 많았었다.
아들은 1학년을 마치고 군 입대를 하고 제대 후 갑자기 유학을 가고 싶다며 어학 학원을 등록하였다. 무더위에 열심히 자전거 페달을 돌리며 다녔다.
3개월 정도로 기억하는데 토플 성적이 유학 수준에 다 달았다고 하였다.
자전거를 탄 것은 아들이 늘 유약하다는 생각에 건강 해 지라고 엄마인 내가 타게 한 것이다. 예고 편입 때와 같이 유학에 대하여 전혀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려운 길을 중도 포기하면 어쩌나 하는 염려가 있었다. 그래서 좀 강해 지기를 바라면서~~
토플 성적 확인 후 유학원을 통해 유학준비를 시작하였다. 본인이 준비한 유학 준비는 차근차근 준비되어 갔지만 부모가 해 주어야 할 부분은 여러 가지가 정말 미흡했었다.
그래도 정해진 출국 시간이 다가와 남편과 아들을 공항까지 데려다주었다. 그 당시 먼 거리 유학을 떠나는 아들에게 넉넉히 여비도 학비도 준비가 안 되어 마음이 많이 아팠다. 그래도 아들에게는 자세한 말을 해 줄 수 없었다.
아들은 유학기간 약간의 용돈에 도움 되는 활동도 하였다. 엄마는 이곳에서 아들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노력도 하였다. 늘 걱정이 되어 시차가 있어 새벽 세시쯤 아들과 카톡을 참 많이 했다.
아들은 짧은 겨울방학 기간 동안 많은 여비를 아끼려 미국 친구 집에서 머물기도 하였다. 나는 무엇을 하는지 궁금해 카톡을 하면 친구 엄마와 이야기를 한다고 하는 때도 있었다. 어느 땐 친구와 친구 아빠가 운전해서 어디론가 드라이브도 시켜 준다고 하였다. 미국은 참 넓다고 하였다.
한국에선 머리도 엄마한테 손질을 받아 부담이 없었는데, 미국은 손으로 하는 일들이 인건비가 비싸 머리 한번 손질하는데 십만 원 정도 한다고 하였다.
십만 원이면 하루 아르바이트 수고비가 다 나간다고 하였다. 한 번은 머리를 길러 사진을 보내왔다. 밑부분은 룸매가 이발기로 밀고 이마에서 정수리 부분은 길러서 위로 묶은 모습이었다. 짠한 마음이 들었다.
그곳 청소년들은 그 나이대가 되면 이발기를 거의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어쩌면 엄마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서 하는 말인지도 모른다.
미국문화는 한국 문화와 많이 다르니 언 행 조심도 당부했다. 겨울이니 눈이 오면 눈도 쓸고 무엇이 할 것 없는지 친구 통해 알아보아서 함께 할 일 도 찾아서 하라고도 하였다. 아들은 그렇게 하고 있다고 하였다.
방학이 끝나고 개학이 되었다. 아들을 방학 동안 돌보아준 친구 엄마에게 조그만 성의 표시를 하고 싶었다. 물품은 자개 선물 박스를 사진으로 찍어 보내 보았다. 아들은 마음에 든다며 보내 달라 하였다. 보자기로 예쁘게 포장해서 보냈다.
아들이 유학한 덕에 수화물을 붙이기 위해 우체국도 자주 드나들었다. 그 시기엔 한진택배 회사가 문제가 발생해 오랜 시일이 걸려 화 물을 받을 수 있었다.
수기로 우리 아들을 방학 동안 보살핀 은혜에 대한 감사 편지도 한글로 써서 넣어 보냈다. 아들에게 영어로 통역해서 친구 엄마에게 들려 드리라 했다.
전달된 물품은 룸매 친구가 엄마에게 보이고 자기가 소중히 잘 보관한다고 전해왔다.
이후 아들은 정해진 유학을 잘 마치고 돌아왔다. 현재는 일도 하고 유학 수업과 연결된 다른 수업도 또다시 온 라인으로 수학 중이라고 하였다. 지금은 떨어져 생활을 하니 아들이지만 어떤 공부를 하는지 잘 모른다.
예고 등교 시 늦게 미술학원 끝나고 오면 밤 11시였다. 집에서 먼 거리 등교시간은 빨라 교통편을 놓치면 태워다 주기도 했다. 아침 먹을 시간도 없어 김밥을 대충 싸서 가지고 가 차 안에서 먹기도 하였다. 그러다 보니 자세히는 모르지만 어느 정도 아들의 일정을 알아차렸다.
이렇게 교육이라는 것이 부모가 하고 싶은 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자녀가 하고 싶다고 계획대로 만족하게 다 되는 것도 아닌 것 같다.
이렇게 우리 아들은 평범한 부모인 내가 바란 인문계 길을 가지 않았다. 현재 아들의 생각은 만족한 지 어떤지 진지 하게 물어보진 않았지만 다른 교육을 받게 되었다.
우리 딸도 나는 반드시는 아니지만 인문학 교육자가 되기를 바랐지만 디자인 공부를 하였다.
다른 사람보다 위가 되기 위한 조기 교육도 중요하고 자녀의 진로문제도 그렇고 참 어렵다.
나도 우리 두 아이의 진로 선택에 있어 선을 그어 주진 않았지만 걱정은 했다. 하지만 아이생각과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이 아이들의 진 로가 되는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