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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공원과 족보 (한국 여성의 족보) 2024, 4, 16

by 샛별상담소 2024. 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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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께서는 내가 어린 시절부터오랫동안 족보나 문집에 대한 글을 늘 쓰셨다.  아버지 종형제분인(사촌) 둘째 아저씨가 (5촌 당숙 ) 대전에서 오광옵셑이라는 인쇄소를 운영하셨다. 익히 잘은  모르지만 아버지께서는  그곳에서 일감을 가지고 오시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후 내가 10대 중반 우리 집은 시골이지만 가내 수공업으로 인쇄소를 하셨다. 아버지는 늘 알루미늄판에 글씨를 쓰시고 어머니는 인쇄가 끝난 알루미늄판을 고무장갑도 없는 시절  모래를 넣어 글씨를 지우셨다. 겨울에도 찬물로 너무 고생을 많이 하셨다. 큰오빠와 바로 위인 언니와 나는 커다란 롤러와 작은 롤러 그리고 잉크( 노루표 ) 물걸레를 (면제품 ) 사용해서 인쇄를 하였다.

한 집안 일감의 인쇄가 모두 마치면 모든 인쇄물을 반으로 정확하게 맞춰서 반으로 접어 방안에 반달 모양으로 페이지 순서대로 펼쳐 순서대로 한 장씩 뽑아 합쳐서 한 권씩 섞이지 않도록 열 십자 모양으로 쌓아 놓는다.

이 작업이 끝나면 책 사이즈를 재어서 칼날 부분이 불룩한 칼을 사용해  일일이 재단을 하였다. 그다음으로 송곳과 망치로 뚫고 철사를 사용해 일차 임시 책이 만들어진다. 다음으로 표지에 노랗게 물들인  한지를 붙인 책 겉피에 양초를 문질러 바른다. 양초가 칠해진 겉피를 무늬목을 대고 큰 사기 사발로 문지르면 무늬가 예쁘게 박힌다. 양초가 묻어 있어 윤기도 난다.

이후 재단된 책 사이즈에 맞게 겉피를  손으로 접어놓은 후 송곳과 망치로 구멍을 뚫는다. 빨간색으로 염색한 두꺼운 면실을 큰 돗바늘에 끼어서 구멍 난 책 가운데 부분부터 책을 꽤 메어 책을 만들고 오른쪽 겉피에 책 제목을 인쇄하여 붙이면 책 한 권이 완성되었다.


(  이 실과 바늘로 책을 엮었다)


(경주이 씨 문헌공파 초려 이유태 1607~1684 (나는 11대 후손이다)  아버지께서 몇 년을 걸쳐 18권의 문집을 만드셨다. 우리 집에서 손수 친필로 쓰시고 인쇄하시고 가족들이 함께 하면서, 몇 질인지 기억은 안 나는데  사랑방 가득히 보관했었다. 한 질 18권씩 회포대( 시멘트 빈포대)로 포장해서 전국 각지 유학자들에게 친지들에게 전해졌다. 어린 나이여서 모르지만 중앙박물관에도 보관되어 있다고 들었다. 혹여 족보 박물관에도 있는지 확인은 해 보지 않았다. 세종시에 초려 역사박물관이 세워졌다. 카메라가 없어 사진으로 제작기록을 남기지 못해 아쉽다.)

집안에서 늘 이런 모습을 보고 직접 참여도 하고 체험을 하였기에 족보에 대하여 익숙했다. 아버지께서는 오 탈자를 가리기 위해 교정을 보시는데 나를 찾으셨다. 그 당시는  나는 한자를 잘 몰랐다. 그런데 아버지께서는  나를 찾으셨다.  어려서부터 천자문과 동문선습 소학 대학책 등 더 많은 고서가 우리 집에는 늘 주변에 있었지만 아버지께서는  가르쳐 주시지 않으셨다.
그래도 아버지께서 시키시면 따라서하다가 쉬운 글자가 틀리거나 탈 자가 있으면 체크는 해 드렸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아버지께서는  이후  재 교정을 하셔서 책을 만드셨을 것이다.
이때  아내가 정부인이정실이고  후실은  배실이라는것 같았다. 족보에는 묘가 어느 산에 위치해 있고  좌양도 다 적시되었다. 위대부터 아들 사위 손자만 들어가고 딸은 들어가지 않았다. 더 자세히는 모르지만~~ 이때부터 우리나라는 성 씨도 많고 종파도 참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  이  천자문은 아버지께서 친필로 자녀들에게 남기신 책이다 )


(  이사진은 아버지께서 친필로 천자문을 쓰셔서 인쇄소에서 달력으로 나온 것이다.)

이후 몇십 년이 흘러  대전 중구 뿌리공원로 79에 뿌리공원이  1999년도에  건설되었다.  처음에는 뿌리라는 단어가 들어 가 자연관찰이나 생물에 대한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현장 수업을 다녀와서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으니 족 보와 관련된 곳인 줄 알았다.

어떤 한 기회가 되어서 족보대학이라는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어 참석하게 되었다. 가장 많이 생각나는 것은 조선시대의 여성족보였다. 신사임당의 족보도 있었다. 신사임당은  율곡의 어머니이기도 하고 일찍이 교과서에서도 올려져 배워 조금은 알고  있었다. 현재는 오만 원권 지폐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의 여성 족보라서 여성들의 놀랍고 소중한 달란트가 현재에도 우리나라의 문화 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준 것을 알 수 있다.

대전의 회덕에 자리  잡은 은진 송 씨가 의 이야기 중에 동춘가의 며느리 김호연재의 글솜씨도 생각난다. 남존여비사상이 심했던 그 시절 좋은 글을 많이 남겼다.  지닌 달란트를 제대로 펴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속앓이를 하다가 세상을 뜬 이 이야기였다.  
다른 여성들의 이야기도 많이 있었지만 가장 많이 기억에 남았다.

여성의 족보는 우리 집에서 만든 세 세손의 족보와 다르게  한 여성의 일대기를 글이면 글 그림이면 그림 그가 남긴 발자취를 총 집합해서 강의가 이어졌다.
나는 그 강의를 들으면서 한 여성 한 여성마다 그 많은 달란트를 그 시대에 제대로 개발할 수 있도록 발전을 도왔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문화와 예술이 외국의 유명한 예술 작품 못지않게 유작으로 우리나라에 더 많이 남았으리라 생각하였다.

수강 중에 내가 어려서 방에서 구겨지고 책 모서리가 말리고 지저분하게 관리가 안 된 책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 이 책은 어머니가 필사하신 책이고 내용 이다.)

나누면서 어머니의 달란트도 생각해 보면서 책을 소개하였다.  그리고 내가 어머니의 성화에 수놓은 베개도 선보였다. 어머니의 필사본도 내가 수놓은 베개도 여성족보의 교수자료가 된 것이다.

(   이 베개 모는 어머니의 성화에 내가 직접 수놓아 만든 것이다.)

이후 부모님이 생전에 계실 때 대전대학교 강ㅇㅇ교수도 그때 만났던 분이다. 20대 때  중국 유학까지 가서  수학했는데도 논문을 쓰는데 가피라는 것을  수없이 많은 학자들을 찾아가도 알 수가 없다고 하였다.
아버지께서 족보와 문집을 직접 제작하셨다는 것을 듣고 아버지 뵙기를 원했다. 이때 이분도 김호연재의 문집을 가지고 논문을 쓰는 중이었다. 그때 기억으로  김호연재가 얼마나 어렵게 책을 내기까지 힘들었다는 것을 표현한 문구가 겨우 가피를 만들었다는 표현인 것으로 기억된다.
그때 아버지께서 가피라는 것이 완성된 책이 아니고 책 겉표지까지 완성 못 하고 속표지만( 겉표지가 만들어지기 전 바로 안에 넣는 속지 ) 끝낸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알 려 주셨다.
나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만큼 김호연재란 한 여성의 삶의 어려움을 대변해 주는 이야기로 이해했었다. 나의 기억과 이해가 정확한지는 모르만 말이다.

이때 나도 어머니의 한글 필사본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어머니가 사대 봉사를 하시는  종부로써 아버지의 생가와 양가를 섬기시면서 십 남매를 양육하시면서 필사본을 남기셨다니 열정이 남다르시다는 것을 깨달았다. 강ㅇㅇ교수분도 소중한 자료라고 생각하며 어머니의 필사본을 제본하고 이후 이미 고인이 된 충남대  명예교수분인 송 ㅇㅇ교수분도 제본을 했다.
두 교수 분들은 내용을 잘 알 것이나 나는 그 한글을 읽을 수가 없다. 내가 배운 한글로서는 말이다. 이번 글을 쓰면서 어머니의 필사 본을 다시 한번 꺼내 보아야겠다 사진도 찍어서 보관도 하여야겠다.

시대가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이제는 족보를 책으로 만드는 곳은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더욱이 한자로 말이다. 정 확히는 모르지만 전두환 정부 때 한자교육이 교과서에서 빠진 것으로  안다. 이후로 한자로 쓰여 책으로 만들어진 족보는 현저히 관심도 인기도 떨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전문적인 학자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말이다.

내가 알기로는 대전시 정동에 위치한 회생사에서 족보를 가장 많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 그 후손이  전 국회의장  박병석 씨인  것으로 알고 있다.  )
2000년대 들어서면서 인터넷으로 인해 족보도 CD로 만들어져 각 집안마다 후손들에게 전해졌다.
현재는 각 종친회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자세하게 검색해서 볼 수 있을 것이다.

나의 개인적인 소견이지만 자녀를 양육하는 부모들은 족보에 대한 관심을 가져보는 것을 적극 권하고  싶다. 나는 전문적으로 인류를 연구하는 전문적인   학자는 아니다. 하지만 전 세계에서 우리 한국과 같이 족보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각  성씨의 기념비 같은  작품을 만들어 세워 뿌리 공원을 조성하고 내부에 많은 족보도 진열되어 있는 나라는 한국뿐인 것으로 알고 있다.
아이들의 인성 교육에도 뿌리공원은 지대한 영향력을 끼친다고 생각된다. 내가 어느 성씨의 후손이고  선대 누가 있고 선대의 삶은 어떤 삶이었는지 알아보고 느껴 보는 것도 큰 교육이 되리라 생각한다.  우리 아이들도 어려서부터 친가와 외가 족보 이야기도 해주었다. 어느 후손이고  몇 대  어느 공 파고 너는 몇 대 후손이라고 알려 주었다.
이후 아이들이 성장하고 딸아이가 시가 어르신들에게 매우 긍정적인 반응으로 관심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아들도 직장에서 동료들과 동종의 성씨에 대하여 화젯거리가 있을 때 궁금한 점이 발생하면 전화를 해 확인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이렇게 자녀와 부모 간의  공감도와 관심도로 친밀도도 높아진다. 사회생활 하는데도 매우 긍정적이고 좋은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 같다.
집에 있는 몇 권의 고서를 사진으로 넣었는데 족보 사진이 없어 아쉬웠다.

(  이 책은 아들의 학교 과제물을 속지는 아들이 하고 겉표지는 옛날 고서를 만드는 방법으로 엄마인 내가 꽤 메어 완성한 빵에 관련된 책이다. )


(  이 사자소학도 아버지친필로 남기신  것이다. 페이지마다 한글로 번역을 해 놓으셨다. 한자를 몰라도 자녀의 교육 도서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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