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8,9
지나가는 나그네 거나, 과거를 보러 가거나 보고 돌아오는 사람을 이르는 호칭이라고 한다.
오늘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과객은 첫 번째 지나가는 나그네와 같이 잊을만하면 우리 마을에 와서 묵거사 바로 돌아가는 분이 있었다. 그의 행색은 갓을 쓰고 두루마기와 나날이 보따리를 대각선이 되게 어깨에 걸쳐 매었다. 종아리 부분에는 행전이 쳐져 있었다. 행색이초라 하고 조용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 위 두장의 이미지는 다음 창에서 검색하여 옮긴 것입니다.)
내가 아주 어린 시절 어른들은 그분의 이름은 김 ㅇㅇ이라고 일렀다. 차 차 성장하면서 그분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조금씩 알아갔다. 늘 대각선으로 메고 다니는 보따리 속에는 무엇이 들었을까 궁금했다.
깨나 여러 날을 묵고 가는 날이면 마을의 일을 보는 이장댁에서 묵는다고 했다.
가끔은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만나 또래들과 함께 마을로 걸어 돌아올 때도 있었다. 그래도 그분과 말을 나누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어른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학식이 매우 높은 학자라고 하셨다. 우리나라의 동족 상전의 비극 1950년 6월 25일로 인해 과객이 된 분이라고 하셨다. 피난길에 가족을 잃었는지 아니면 홀 홀 단신으로 피난을 온 분인지 자세한 내막은 잘 모른다. 어른들이 말씀하시는 이야기를 옆에서 들으면 우리 마을을 드나들듯 전국적으로 인연을 맺고 지낸다고 하셨다. 성균관 유림과 관련된 수준의 학자들과 동등한 학식이 있는 분이라고 하셨다.
나중에 알았는데 자주 왔다 갔다 할 때는 어느 댁 낭자와 규수감을 이어주는 중매를 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현재로부터 오십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전라도와 경상도 충북 보령 이런 곳은 꽤나 먼 거리였다. 이렇게 먼 거리의 인연을 이어주는 일을 했던 것 같다. 어떤 가문에 이런 낭자가 있고 이런 가문에 이 처자가 있다 하면, 대상 부모들은 직접 찾아가 자세히 알아본 후 혼사를 성사시켰을 것이다. 이런 중요한 일륜지 대사는 대단한 신뢰 관계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만큼 전국을 돌며 숙식을 안정적으로 해결수 있을 만큼 신뢰 관계도 믿음직했었을 것이다.
오랜 세월 전국적으로 맺은 방랑의 삶을 조금 더 자세히 알았으면 하는 마음에 아쉽다. 특별한 삶으로 내가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면 좋은 글감이 되었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인연을 연결해 주었을지 글 쓰면서 생각한다. 지금은 결혼 정보 회사라는 사업장을 내어 운영을 한다. 영상 매체를 통해 선전을 하거나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진 유명 회사도 있다. 어리지만 대면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면 그동안의 방랑의 삶에 대한 얼마나 많은 사연이 표현되었을지 아쉽다.
교통수단은 도보가 아니면 자주 운행이 안 되는 버스였다. 지금 생각하면 늘 행동반경이 느렸을 것이다. 그때 당시는 정확한지는 모르지만 라디오에서 오정쯤이나 오후 한시쯤
방랑객 김삿갓이라는 프로그램이 진행된 것으로 기억된다. 나는 그 방송을 들을 때마다 우리 마을을 자주 찾는 그분이 생각났다.
조금 더 시대를 내려가 짐작해 본다. 이 때는 아마도 마을 밖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이 과객이나 방물장수, 죽제품을 파는 사람, 새우젓장수, 옷 장수, 화잠품 판매원들이다.
내 기억에 새우젓을 이고 다니며 파는 강경 아줌마로 기억된다. 그때 당시는 내가 어린 나이라 이해력이 부족해 그냥 순수한 새우젓 아줌마로 생각했다. 철이 난 후 생각하니 새우젓은 소금 간이 돼 있어 매우 무겁다. 새우젓 무게만큼이나 그 아주머니의 삶도 무거웠다고 생각된다.
여러 가지 죽 제품을 우리 집 광에 부려놓고 팔던 전라도 아주머니도 생각난다. 그 당시 듣기로는 전라도 지역에는 비가 많이 내려 홍수로 인한 수해와 가뭄으로 인한 흉작으로 농사가 피룡 한다고 하였다. 그럴 때 머리숱이 작은 쪽을 찐 아주머니가 허름한 차림으로 팔 만큼의 죽제품을 덜어 어깨에 메고 나가 어떤 마을로 가는지는 모르지만 다 팔면 우리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몇 차례를 그렇게 나누어 팔고 다 팔면 다시 본댁으로 돌아가 한 동안 세월이 흐르면 다시 찾아왔던 기억이 난다.
우리 집에 묵을 때면 어머니께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였다. 아들 딸들을 여럿 두었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돌이 갈 때면 고맙다는 표현으로 새 죽제품을 내놓았다. 그러면 어머니는 우리 집에는 많은 죽제품이 있으니 그냥 두라고 하시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도 두고 갔는지는 잘 모르겠다.
세월이 좀 더 흐른 후 화장품을 판매하는 아줌마는 자전거를 사용했었다. 그 당시 화장품 용기는 거의 유리제품으로 중량이꽤나무거웠다. 가가 호호 방문하면서 여성들을 상대로 다른 마을 소식도 전하고 여성들의 새로운 미도 전했다.
엿장수는 엿과 여러 가지 자질구래한 생활용품을 손수레 위에 진열해 다녔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구정 때는 가래엿을 가지고 오면 오빠또래들이 엿치기를 하였다. 엿치기는 언 엿을 양손으로 힘을 가해 반으로 딱 자르면 나타나는 구멍의 크기와 수로 승패를 가늠하였다. 다른 종류의 엿은 넓은 판 엿인데 넓은 칼과 가위로 잘라 파는 엿이 있었다. 그때 엿값의 자원은 헌 고무신이나 사용이 가능하지 않는 철 조각이나 농기구들이 이었다. 그때는 어른들의 긴 머리카락도 받아갔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엿장수가 쩔컥 쩔컥 소리 내는 넓고 큰 검은색 가위소리다.
(위의 이미지 사진은 다음 검색창에서 옮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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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 장수 아주머니는 여름보다는 겨울옷을 가지고 온 기억이 난다. 그 아주머니의 남 편은 폐가 안 좋아 가정 경제를 책임진다고 하였다. 꽤나 부피도 있고 무게도 나가는 큰 보따리였다. 혼자서는 머리에 일수가 없어 누군가는 도와주어야만 일수가 있었다.
우리 집에서도
식사 대접을 한 기억이 난다. 어떤 이유로 식사대접을 한지는 모른다. 아버지께서도 한 학자이시고 유림에 관한 일들에 참여도 하셨다. 이런 이유로 자연히 통하셨을 것으로 예상이 된다. 이때는 동성동본 혼인이 가능하지 않았다. 그런데 여성 운동가이고 이화여대 이숙종 교수가 8 촌간 혼인을 주장한다는 이야기가 들리는 시기였다. 우리 마을 어른들과 과객분은 반대입장이었다. 세월이 어느 정도 지나 인정 되어 통과된 것으로 안다.
다시 또 생각하지만 오늘 글쓰기교실을 통해서 글을 쓸 줄 알았다면 더 많은 것을 알아 놓았다면 얼마 좋았을까 하는 마음이다. 그분의 삶은 일반적이지 않고 특별한 삶이기 때문이다. 현재 많은 매체에서 특별한 삶을 사는 이들의 삶이 많이 공개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떤 삶은 아이가 어른이 생각하지 못하고 행동할 수 없는 삶을 살고 있다. 반대로 어른이지만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을 감당하는 삶이 있다. 또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저런 일 을 하면서 보는 이들로 하여금 놀 라게도 하고, 비난을 받는 삶도 많다.
그 과객분이 내 기억으로 근 20여 년이 지나가는 어느 해 봄 이장 댁에서 숨을 거두었다는 부고를 들었다.
이장댁은 큰 산 밑에 일자집으로 지어졌다. 다섯 칸의 방이 있었다. 뒷 뜰에는 커다란 자두나무도 있었다. 여러 가지 식물들이 많았다. 봄에는 잎이 무성하고 초여름이면 꽃대만 남아 분홍색 꽃이 피는 난도 있었다.
담 밖으로는 두릅나무도
있었다.
꽤나 넓게 기억이 된다. 이 댁은 독립 유공자 집안이다. 매년 봄이면 전국에서 유공자를 기리는 제에 참석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온다.
사랑방 앞 약간 비탈진 화단에는 봄이 되면 황 매화가 많이 피었다.
여름에는 붉은 바탕에 검은 점이 많이 있는 나리꽃이 피었다. 내가 어릴 때는 그 꽃이 얼룩얼룩해서 호랑이
꽃이라고 했다. 꽃대는 길게 자라면서 잎사귀마다 콩크기 만한 까만 열매가 맺혔다.
(위의 식물 이미지는 다음 검색창에서 검색해서 옮긴 이미지사진입니다.)
다른 손님들도 자주 많이 찾는 집이었다.
그 당시는 동네 사람들이 한 해 농사를 위해 못자리를 만드는 시기였다. 현대와 같이 기계화가 크게 발달하지 않은 시절이라서 가족들이 사랑 마당에 모여서 못자리에 넣을 모판을 만들 때였다.
계절은 봄이라 두견새도 울고 뻐꾹새도 울고 개구리소리도 많이 들렸다. 자연의 훈기를 받아 주의의 나무들은 연두색깔 잎이 피기 시작하는 봄이 기억된다. 그 과객분은 그렇게 한 세상을 살다 갔다. 나는 매년 그즈음이 되면 그분의 부고가 전해졌을 때 가 생각난다.
나중에 알았지만 대각선으로 메고 다니던 나날이 보따리에는 행색을 책임지는 여벌의 옷이 들어있었다고 하였다. 당시는 대게 의복천은 무명옷이 많았다. 화학 섬유와 달리 쉽게 해졌을 것이다. 옷이 해어지면 좋은 일을 하는 분이니 도움을 준 댁에서 받거나 더 특별히 인연을 맺고 지내는 분들이 해결해 주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이 든다.
이장댁에는 내 또래의 딸이 있었다. 그 딸을 통해 그런 정도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장례도 이장댁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도맡아 잘 치른 것으로 알고 있다. 평생을 가족과 연락도 없이 작은 나날이 보따리 속의 여벌 옷만을 소유한 가벼운 삶이었다. 내 생각이지만 중매를 위한 기초적인 정보가 적힌 내용도 들어있었을 것이다. 여비는 어떤 소득을 내기 위한 계획적인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학식이 있는 분이니 다른 사람들의 비문을 지어주고 써주거나 한 대가로 손에 쥐어지는 것으로 마련하지 않았나 미루어 짐작한다.
그분의 가벼운 삶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궁금하다. 내가 외적으로만 보아 가벼워 보였지, 그분은 무겁고 복잡한 삶이었을지도 모른다. 한 사람의 숭고한 삶을 예단하는 것은 큰 실례가 된다는 생각도 든다.
현시대로 견주어 노숙자를 생각해 본다. 가끔 노숙자를 보거나 기사를 볼 때 그 과객분이 지금 시대의 사람이었다면 어떤 삶을 이어갈까 하는 생각이다.
그 당시도 집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때가 되면 밥을 얻으러 오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 과객분은 오랜 세월 전국을 자신과 함께할 수 있는 신뢰 관계를 유지한 대상들을 통해 어렵지 않게 숙식을 해결한 것 같다. 자세한 것을 모르니 조용한 삶을 살면서 구차하지만 때를 따라 숙식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었을까 적지 않은 그 만의 노력이 있었을 것으로 미루어 짐작한다. 작은 보따리를 꾸린 것의 이유는 분명 있을 것이다. 잃은 상실이 너무 커서 다 버리다 보니 작아졌는지, 인생의 짐이 무거워
버리다 버리다 버릴 것이 없어 작아졌는지, 아니면 자의가 아닌 타의로 송두리 채 모두 잃었는지 궁금하다.
그 시대를 함께하며 숙식을 제공한 분들은 나보다 더 자세한 내막과 오랜 세월 그를 겪어 보면서 개인적인 신뢰로 알게 되어 그에게 숙식을 대접했을 것이다. 그가 한 번도 아니고 오랜 세월 숙식을 해결하기 위한 토대를 형성하기 위해 많은 심열과 노력과 실천이 있었을 것이다.
오늘도 그가 늘 대각선으로 맨 작은 보따리가 만들어진 이유가 궁금하다. 그리고 마음으로 평가를 내 본다. 모든 사물의 유기체는 과정을 통해 결과가 만들어진다. 어른들 말씀대로 6,25가 만든 많고 깊은 상처가 만들어낸 과객의 호칭과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한 작지만 평생을 함께한 가장 필요한 삶의 도구로 생각한다. 그리고 타인에게는 별스럽지 않게 보였겠지만 과객분에게는 명품백이 아니었나 짐작해 본다. 그리고 전국을 방랑하며 지내는 동안 여벌 의복만이 아닌, 그 만이 설정하고 지킨 갖가지 인생철학이 담긴 심오한 문서보따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