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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명언들 2024년 11월 5일

by 샛별상담소 2024. 1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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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들어가면서 부모님  생전에 하신 말씀이  순간순간 생각난다. 오늘은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면서 글로 남긴다. 어머니는 칠십 대 중반 풍이라는  질병의 후유증으로 고생하셨다. 증세를 바로 알아차리지 못해 늘 가슴 아팠다. 당시 어머니는 서울에 사는 두 여동생의 집을 방문하셨다. 동생들은 엄마가 자꾸 주무신다고 했다. 피곤하셔서 주무시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며칠 후 막내 여동생이 엄마가 구안 아사가 왔다는 이야기를 했다. 지금같이 영상으로 통화를 했더라면 어머니의 표정을 보고 알아차렸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쉰 마음이 매우 크다.

이후 계속 치료 후 구안아사 증세는 치료가 되었다. 그러나 왼쪽 편 마비 증세는 완치가 되지 않았다. 노인 병원에 입원 하시전까지 수동 휠체어도 사용하시고 전통휠체어를 사용하셨다. 보행은 어느 정도 가능 하셨지만 동네 어귀까지 는 좀 어려우셔서 휠체어를 자주 사용하셨다. 가벼운 운동 기구로는 유모차도 사용하셨다. 처음엔 지팡이 집는 것도 싫어하셨다. 아버지와 두 분의 식사 정도는 해서 드셨다. 하지만  해가 갈수록 기력이 저하되시면서 부상을 당하시는 일이 여러 번 있었다.

속히 응급치료를 했었더라면 고생하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하는 후회도 많이 하고 죄스런 마음도 많이 있었다. 25년 전  만해도 뇌졸중이 진단되면,  약물 복용과  용해술이라는 의료 용어를  아는 사람이 많이 없었던 것 같다. 어머
니는 늘 저혈압 이셨는데  연세 드시면서  고혈압이 되셨다고 하셨다. 그 당시는 혈압약 복용도 안 하셨던 것 같다. 늘 저혈압으로 알고 있으셨기 때문이다. "혹시 이 글을  보는 분 들 중 나와 같은 불효로 후회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내 생활 바쁘다는 핑계로 부모님 건강을 나와 같이 챙겨 드리지 못해 후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요즘은 증세가 보이면 곧바로 응급처치하고 집중 치료하면 큰 고생 안 하고 관리하며 집에서 잘 지내는 분들도 많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수년이 지나고  나는 부모님 두 분만이 생활하시는 관계로 일주일에 두세 번 방문해서 8~9년 부모님을 돌봐 드렸다.

노인 장기 요양제도가 2009년도부터 적용되었는데 부모님은 내 자식들이 있는데 왜 남의 도움을 받느냐며 불편해하셨다. 부모님은 이 땅에 안 계시지만 잘 보살펴 드리지 못해 늘 후회가 된다.
음식도 해 드리고 의복도 사다 드리고 많은 부분을 돌 보아 드렸다. 대전에서 부모님이 계시는  공주까지  그렇게 멀지는 않으나, 내 생활이 있으니 늘 쫓기는 상황이었다. 만학으로 학비를 위한 아르바이트도 하면서, 직장을 잡아 상시 근무도 했었다. 상시 근무할 때는 논산에서 퇴근해 한 시간여를 운전하고 달려와서 도와드렸다.  그리고 다시 유성으로 와야 했다. 대학과 대학원 논문도 쓰는 시기였다. 무사히 논문도 통과해 석사 학위도 취득했다. 컴퓨터는 코끼리 타법으로 천천히 익히는 수준으로 참 많이 힘든 논문이었다. 그때는 잘 느끼지 못했는데 참 바쁜 세월을 보냈다는 생각이 든다.

부모님을 찾아뵐 때마다 많은 말씀도 나누고, 어머니는 늘 딸을 사랑이 담긴 말씀을 간접적으로 에둘러 많이 해 주셨다. 그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말씀이 들이 있다. 나이 들어가면서  더 생각난다.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 '' 체형 변하기 전에 좋은  옷도 사 입고, 이 좋을 때 좋은 음식도 많이 사서 먹어라,, 하셨다. 어머니가 말씀하실 때는 매일 가기 바쁘고 돌아오기 바쁜 핑계로, 더 공감하고 경청하지 못했다.  좀 늦더라도 자세하게 깊이 있게 나누어 드리지 못한 생각에 후회스럽고 죄송하다. 어머니가 돌아 가신지 5년 여가 되니 어머니가 하셨던 말 씀들이 더 생각난다.

오늘도 착용한 옷이 지난해에 는 편했었는데 체중은 같은데 왠지 불편했다. 나잇살이 붙는 말이 헛 말이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내가 헤비급은 아닌 것 같다.  

앞 니도 올여름 20년 전에 기둥을 세우고 씌웠던 이가 염증이 생겨 많이 힘들었다. 음식을 씹을 수도 칫솔질조차 힘들었다.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어머니 말씀이 참 많이 생각이 난다.  어머니 모시고 치과를 방문한 기억도 난다. 치료를 위해, 이를 가를 때 나는 소리가 매우 싫다 하셨다. 그래도  다녀오셔서는 많이 편해지셨다고 하셨다. 어머니가 보내신 지난날이 나에게도 돌아오는 것이기에 더 생각난다.

  94세의 일기로 돌아오실 수 없는 먼 길을 가신 어머니 일생을 담은 말씀이라 생각하니, 이 순간도 눈시울이 붉어지고 가슴이 저리다.
당시 말씀이 구체적으로  문장으로 그 몇 자 안 되니, 그 말씀을 가지고 어머니 마음을 혜아리며 나누었다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어머니는 딸에게 해  주고 싶은 말씀이 많으신데 매일 바삐 오고 가는 딸이니 함축해서 하신 말씀 같다는 생각이 이제서 드는 것이다. 시간을 좀 넉넉하게 드렸더라면 어머니의  젊을 적  이야기도 많이 하셨을 것이다.

  어머니의 체형은 언제부터 바뀌시는 것을 느끼셨는지, 풍으로 진단되고, 이후 삶의 질에 대한 표현을 하실 수 있도록 여유 있게 해 드리지 못한 것도 후회된다. 편 마비로 행동반경에 제한이  되어 혼자서는 외출을 하실 수 없어 얼마나 마음에만 두고 있으신 일과 말씀들이 많으셨을까?

90세가 되기 전 조금이라도 고우시라고 분홍색 옷을 사드렸는데, 나이 든 사람이 이런 옷을 입으면 안 된다며 안 입으셔서 교환해  드린 기억도 난다. 그런  때도 좀 더 깊이 어머니 마음을 배려하고 공감했더라면 어머니는 더 많은 말씀을 하셨을 텐데 아쉽다. 무엇인가 더 깊이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러셨을까 자세한 이야기를 하실 수 있도록 시간을 드렸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이 옷은 어머니가 둘째 손주 며느리를  보실 때 사드린 여러 가지 옷 중에 한 가지 옷이다. 분홍색이 아래 부분만 들어 있는데도 잘 안 입으셨다. 이유는 "남의 눈에 흉이,, 된다고 하셨다. 나이 들어 입는 옷이 너무 고와 체신이 없어진다 하셨다. 이 부분에서도  어쩌면 또 다른 이유도 있으셨을 것 같다. 왜냐하면 어머니는 80세가 되셨을 때 " 이게 웬일 이라니 에미가 팔십을 산다니,, 하셨기 때문이다. 장수라 생각하시고 걱정을 하신 의미도 다시 생각해 보니 이 또한 아쉽다 다.

어머니는 평생 쪽을 찌셨다. 동백기름을 사다 드린 적도 있다. 다락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잘 보관하시면서 사용하셨다. 혹시 엎질러질 것을 염려하여 매우 조심스럽게 보관하신 것이다. 그때는 신체적으로 불편하지 않으신 때였다. 몸이 불편해지시면서 머리 관리가 불편하신 것을 알고, 큰언니가 미장원에 모시고 가서 머리를 짧게 해 드렸는데도 다시 기르시곤 하셨다. 이때 평생 처음 미장원을 가셨다. 점점 몸이 쇠약해지시면서는, 미용도구를 가지고 가서  3~4주에 한 번씩 머리 손질을 해드렸다. 이때도 옆머리 카락은 귀에 걸치도록 손질을 해드려야 했다. 이유는 "돌아가실 때 머리가 가지런히 얌전하여야,, 한다고 하셨다. 앞 가르마를 반듯하게 타 드리고, 양 옆머리 카락은 항시 귀에 걸릴 정도의 길이로 잘라 드렸다. 양쪽으로 똑딱이 까만 머리핀을 꽂아 앞모습은 쪽진 머리 모습으로 보이셨다. 마음에 드시는지 거울을 보여 드리면 깔끔하다 하셨다. 잘 됐다 하셨다.

어머니 머리 손질 내용을 표현하니 또 어머니의 사랑과 관심 담긴 말 씀이 생각난다. 언젠가 내가 출가 전 기억이다. 너는 뒤머리가 없는데 그렇게 하니 보기가 좋다고 하셨다. 그때 파마를 처음으로 했던 것 같다. 파마가 납작한 뒷모습을 살려 준 모습을 말 씀 하신 것이다.  지금 드는 생각이지만, 어머니의 자녀에 대한 사랑과 관심은 하나하나 다 거론할 수 없지만 그 자애가 늘 참 깊으셨다. 그때  하신 말씀 중에 "머리가 열 가지 흉을 가린다라는 말씀이셨다,, 머리 스타일이 얼굴의 이미지를 좋게 한다는 말씀이셨다.

어머니는 요양병원에 가시전 까지 치마를 착용하고 사셨다. 허리가 앞으로 굽어 치마가 약간 쓸려도 꼭 치마를 입으셨다. 이유는"여자는 치마를 입어야 어떤  수스러운 사람이 방문해도 얌전해 보여야,, 한다고 하셨다. 치마도 계절 따라 여러 개 많이 사다 드렸다. 어느 때는 겨울에 따뜻하게 보온성을 높이기 위해 좀 도톰한 치마를 사다 드렸는데 잘 안 입으셨다. 이유는 "  나이 들면  모양도 좋지만 개쁜하고 편한 옷을 입어야 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시간을 따로 내서 특별한 말씀을 하신 기억은 없지만. 어떤 기회가 될 때마다  가끔 하신 말씀들이다 "여성들이  태중에 아기를 가졌을 때 허리춤에 어떤 물건이나 지패를 숨기듯 넣으면  안 돼,, 이유는 태아에게 안 좋은 영향이 간다는 말씀이셨다.  그리고 태중에는 "깍두기 한쪽을 먹어도 정사각으로 반듯한 것을 입에  넣어야 한다,,  "어떤 자리에 가서 앉을 때에도 모서리에 앉지 말고  바른 자세로 중앙에 앉아라,,  "남의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된다,, "  말 수가 많으면 실 수가 많은 법이니 말을 적게 하라,,  언제 누구와 함께하는 자리에서도 "줜 번 줜 번 말을 많이 하는 것은 좋지 않다,, 하셨다. 등등  을 기회가 주어지면 하셨다. 그때는 그냥 스치는 말씀으로 들은 것 같다.  기억을 떠 올려 생각하니  이러한 말씀들은 태중의 아기에게 좋지 않은 영향이 갈까 해서 두고 하신 말씀이다. 요즘 말하는 태교에 대한 교훈이다. 그리고 일상행활에서 자녀들이 수(책 잡힐까) 빠질까 봐 하셨던 말씀들이다.

순간 생각이 난다. 어머니는 남동생들이 어려서 말썽을 부리면 "때려  놓을 놈,, 이라는 말씀이 어머니의 최고 화의 표현이셨다. 어머니 보시기에 좋지 않은 습관이다 생각되시면, "가랑비 옷 젖는 줄 모르는가,, 하셨다. 처음엔 별 문제가 안 되지만 사람에게 환영받지 못할 일이  반복되면 점점 커져 문제 되는 일이라고 하셨다.

어머니는 이렇게
자녀들의 태교도 하시고 양육도 이런 마음으로 하신 것 같다.
몇 가지만 예를 들어 생각하며 글을 쓰다 보니 나의 적은 소치는 어머니의 마음을 얼마나 간파해 드리지 못했는지를 이제야 깨닫는다. 참 변변치 못하고 어리석음이 많은 딸이다. 어머니가 늘 해 주시던 좋은 말씀들이  참 많으실 텐데 기억이 안 나 몇 자 적어 보았다.

이 책은 어머니가 손 수 필사해서 남기신 책인데 무슨 책인지 읽어 볼 수가 없어 아쉽다. 친정집에 자주 갔을 때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 책이지만 가지고 와서 보관하고 있다. 언젠가 요양병원에 계실 때도 이야기 속에 필사본을 말씀드리니 어디 있는지 궁금해하셔서, 잘 가지고 있다고 하니 좋아하셨다. 한 번도 이 책을 어머니와 함께 전체적으로 읽지 못했다. 설명도 듣지 못했다 정말 아쉽다.

무슨 책인지 몰라  오래전 고 송백헌 교수분이 복사 본으로 남긴다 했는데, 이후 만나지 못해 설명을  듣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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