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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 2024년 11월 15일

by 샛별상담소 2024. 1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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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마다 수능 일이 다가오면 생각나는 아들의 말이 생각난다. 아들은 일반고등학교 1학년 재학 중 12월쯤 예고에 편입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간 한 번도 미대를 지원하기 위한
어떠한  준비를 한 적이 없었다. 평소 딸과 다르게 아들은 말 수가 많지 않았다. 그런데 중요한 시기에 갑자기 학교를 바꾸면서까지 자신의 새로운 진로에 대한 의사를 밝혔다. 그것도 인문계에서 예고라니 엄마로서 적지 않게 고민이 되었다.

    그해 12월부터 집 근처 입시학원에 등록을 해 미술을 시작했다. 대전에서 그리 유명한 입시미술 학원도 아니었다. 하루는 방학 동안은 학원에서 숙식을 하면서 지낸다고 하였다. 학원 대표선생님의 제안이었던 모양이다. 예고 편입을 위한 준비 시일이 가까우니 시급한 선택인 것으로 알고 진행하였다. 아들을 숙식까지 함께하며 지도를 해주는 성의가 고마웠다. 그렇다고 학원비를 올리지는 않는다고 하였다. 고맙기도 하고 미안한 마음에 가끔 반찬을 만들어 아들에게 들려 보냈다. 가장기억에 남는 반찬이 돼지고기 김치찜이다

   재료는 돼지고기 앞다리살과 김장김치, 파, 마늘, 고추장, 설 탕, 매실 진액, 들기름, 들깻가루이었다. 집 근처  가까운 마트 안 정육점에서 좀 넓고 길게 썰어서 판매를 하는 곳이 있었다. 연하게 하기 위해서였는지 잘게 마름모꼴 모양이 나게 눌러져 있는 고기를 구입했다. 가장 먼저 고기의 잡맛을 잡기 위해 빻아서 얼려 놓은 언 생강을 물에 담가 우려낸다. 우려낸 생강물에 마늘과 들기름, 들깨가루를 넣어 밑간을 하였다. 후에 김장김치 한 겹 고 기한겹씩 반복해서 캐캐히 넣어 물을 넣고 푹 끓였다. 김치와 고기가 어우러져 구수한 맛이 풍기면 간을 맞추고 파를 넣고 좀 더 끓여 완성한다. 완성된 음식을  스탠 밥통에 넣어 보자기로 싸서 보내기도  하고 아들과 함께 방문해서 전하기도 했다.

(돼지고기 김치찜을 담은 스텐 밥통)


  이렇게 방학이 끝나고 학교 행정 처리가 시작되었다. 담임선생님과 상의하고, 고민도 참 많았다. 본인이 원하는 것이니 편입 시험을 보고 합격하면 좋고, 안되면  다시 돌아오는 것으로 결정을 하였다.

  편입 시험이 다 기왔을 때  혹시 안 되어 실망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많았다. 편입시험은 미술 실력이 아니고 구술 면접에 많이 취중 했다고 하였다. 아들은 다행히  합격을 했다.

  2학년에 편입을 하니 교복 구하기가 어려웠다. 예고는 학생 수가 많지 않아 교복을 여벌로 만들어 놓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바지와 셔츠, 조끼는 여러 매장을 돌며 구입해서 사이즈는 수선을 해서 입혔다.  동복 재킷은 졸업할 때까지 못 입고 졸업을 했다.

   예고는 학비도 일반고와 많이 차이가 있었다. 미술학원비며 미술도구, 대회참가비등 참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아들은 말은 잘 안 하는데, 등교해서도 미술 수업량이 많고 하교하면 이어서 학원 미술 수업으로 이어졌다. 학원차로 집에 도착하면 저녁 11시쯤 된 것 같다. 엄마 마음 에는 씻고 바로 자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았다.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무엇을 하는지 늦게  까지 핸드폰을 손에 들고 있었다.

  늦게 자니 아침에는 자연히 일어나기 힘들었을 것이다. 가끔은  등교 봉고차도 놓친다.
아침도 건너뛰게 되면 김밥을 급하게 싸서 차에 태우고 가면서 먹게 했다. 때로는 입시제도가 새롭게 바뀌어 미술 학원 수업 후 집에 돌아와 다른 과목도 과외로 준비해야 했다. 갑자기 새로  시작한 예고 수업을 따라가기가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미술이라는 것이 노력도 중요하지만, 실기를 반복해서 쌓는 실력으로 아는데. 얼마나 힘들었을지 지금 더 안쓰럽다. 그때는 그저 따라 잡기에만 급급했다. 어느 땐 차에  태우고 가다 보면 눈이 감겨 있다. 내 차에는 항시 울소재로 되어 있는 커다란 숄이 있다. 잠을 제대로 못 자고 아침을 제대로 먹지 못할 때는 춥다고 하여 덮개용이었다.

  이 호랑이 그림은 아들이 예고시절 돈운 예술제에 출 품한 그림이다. 개인 작품은 아니고  아들 외 두학생의 합 작품이다. 

(아들이 예고 재학중 아들 외 2명의 합직품)


 아마도 대상  작품이었던 것 같다. 그림이 매우 큰 작품으로 왔다 갔다 하면서 그려야 하기 때문에 시장에서 편한 바지를 한 개 사 주었다. 신축성이 좋고 매우 부드러운 천이었다. 미술 작업복으로  잘 입었다.
호랑이그림 입 안에 들어간 사람이 아들이다. 그림이 커서 구석에 넣고 천장까지 닿았다. 옆에 놓인 꽃바구니는 내가 축하 꽃으로 아들에게  준비해 준 것이다. 꽃 바구니와 비례해  그림이 이렇게 컸다.

   이런 어려운 과정을 잘 마치고 대학 입시를 위해 수능을 보았다. 뒷베란다 문을 열고 보니 수능을 보고 아이들이 한꺼번에 무리 지어 나오는데 우리 아이는 한 참이 지나도 나오지 않았다. 좀 더 기다리다  수능 본 학교가 집 근처라 가보았다.  교실에서 방금 나왔는지 아들은 또래 몇몇이 서서 "재수 못 해, 재수 못 해, ,, 하면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지금도 수능  때가 되거나 수능 관련 이야기가 나오면 아들이 했던 말이 생각난다.

   아들이 수능 보는 날 따뜻하게 많이 먹이려고, 전복죽을 만들었다. 사다 주어도 되지만  넉넉하게 만들어 보온도시락에 싸준 기억이 난다. 이 도시락이 그때 사용 한 도시락이다. 구입계기도 아들의 보충수업 관계로 구입한  것 같기도 하다.  아 지금 잘 생각하니 대한민국 학원에서  중 학교 때 지도하는 선생님이 도시락을 싸서 보내면 저녁 식사 후, 늦게 까지 공부 지도를 원 해서였다. 그 선생님은 지금쯤 어디서 아이들 을지도 하실까?..

   이후 아들은 확실치는 않은데  가, 나, 다. 순 군의 학교에 모두 합격하였다. 대입실기를 볼 때도 거리가 있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데리고 왔다. 어떤 학교는  아이들이 입실을 해서 그림을 그리다 중간에 나왔다. 이유는 화지 면을 뒤집어서 나누어주었다고  하였다. 당시 우리 아들은  나오지 않아서 자세한 이야기를 못 들었다. 화지를 받으면 받은 그대로 뒤집지 않고 그렸어야 하는데 화지가 뒤집혀서 나누어졌다는 이야기였다. 중요한 시험인데 의아한 생각이 들었던 기억도 난다. 옆에서 가만히 듣다 보니 자기 자녀가 미대를 지원하는데 3 수라고 하였다. 미술 외 수능에 적용되는 수학점수와 사회문화등도  잘 몰랐다며 놀라는 부모도 있었다. 그 부모의 아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도 하다.

  아들은 이렇게 많은 경험을 하게 했다. 아들은 다 같은 디자인과지만  본인이 원 하는 디자인 계열의 나군을 선택해서 입학을 했다. 국립 학교니  학비도 저렴했다. 딸도  미대였는데 사립이라서 삼분의  이는 더 많았다. 1학년을 마치고 군에 갔다며, 휴학을 했다.

  신체검사를 위해 열심히 운동도 하였다. 의경시험을 봐서 합격해  입대를 했다. 입대하는 날 늘 장이 안 좋은 아들을  위해 매실 액을 희석해 가지고 갔다. 매실액을 마시려 할 때  연병장으로 모이라는  명령이 떨어져 마시지 못하고  그냥 갔다. 매실액 한 모금을 마시지 못하고 간  아들을 생각하며 매우 애석했다. 우리 가족들과 아들 또래들은 매일 용기를 잃지 않고 훈련에 임 하기를 바라며 짧은 글 편지 써서 보냈다. 훈련이 끝나고 저녁때가 되면 부대 관련 책임자가 편지를 복사해 읽을  수 있도록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그때 썼던 모든 편지를   인쇄해서 보관하고 있다. 기회가 되면 책자로 만들어 남기려고 한다. 간간히 담당 관리자에게도 아들에 대한 소식 전화 도왔다. 아들도 훈련병생활도 잘했는지 전화도 왔다.

  훈련 마치는 날이 추석을 앞둔 며칠 전이었던 것 같다. 나는 추석음식을 간단히 만들어 싸고, 아들이 좋아하는 피자와 치킨을 사가고 갔다. 아들에게  가족이 못 오는 동료가 있으면 함께 오라고 했다. 엄마가 음식을 넉넉히 준비했으니 말이다.  알았다고 대답은 했는데, 훈련 마치고 나올 때는 따로 장소를 마련해 돌 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였다. 오랜만에 보는 집 음식이 많다며 좋아는 하는데 많이 먹지는 않았다.

  배치도 여러 곳이 있는데 어느 곳으로 떨어질지 궁금해하며 헤어졌다. 다행히 집 가까운 곳으로 배치되었다. 군에 복무 중에 군 인권 영화도 만들어 상도 탔다.

(이 영상이다.)
https://youtu.be/A3 vbwuUZp68? si=6 lvMsH04 kBytK3 QB

  군복무 시 금연 포스터도 디자인해서 보건복지장관 상품으로 노트북을 받았다.

(보건복지부장관상,금연 포터 디자인으로 상품으로받은 컴퓨터)

   군복무를 잘 마치고 제대를 한 후 아들은 갑자기 유학을 간다고 하였다. 경제적 여유도 없는데 그래도 남편은 허락했다. 여러모로 참 걱정이 많았다. 더운 여름 아들의 유약한  부분이  강하게 되길 바라며 운동 삼아 자전거로 어학 학원을 다니게 했다. 삼 개월여를 다니면 토플점수를   유학 수준에 도달하게 만들었다. 혼자 다니면서 유학원을 통해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지원서를 내고. 미국 예술컬리지 30프로 디씨 장학생으로 떠났다. 2년 동안 수학 하는 동안 한국에는 한 번도 오지 않았다. 나도 보고 싶고 아들도 오고 싶었겠지만 경비가 만만치 않아서이다. 공부를 하면서 아르바이트도 한다고 했다.

  겨울 방학은 여름 방학보다 짧아 미국인 친구 집에서 머문 적도 있다.  너무 고마운 일이었다. 나는 아들에게 겨울이니 눈이 오면 친구에게 물어봐서 눈도 쓸고, 머 할 것이 없는지 물어서 도와주고 함께 하라고 했다. 아들은  안 그래도 그렇게 하고 있다고 하였다. 학교와는 또 다른 한국 문화와는 많이 다를 것이니 조심히  잘 생활하라고 하였다. 어느 때 카톡으로 연락하면  친구 엄마하고 이런저런 대화를 한다고 하였다. 영어로 막히지 않는지 물어보면 어려운 단어가 아니라 어렵지 않다고 하였다. 처음엔 수업이 영어로 진행되어 힘들다며 , 한국에서 책을 사 보내라는 주문도 있었다. 그래서 엄마 입장에서 매우 조심스러웠다. 어느 땐 친구 아빠와 함께 좀 거리가 떨어진 곳으로 드라이브도 한다고도 했다. 시차가 있어 아들 과는 항시 새 벽두 세시쯤에 카톡으로 연락을 했다. 아들 친구 가정에 조그마한 인사라도 해야 하는 마음으로 자개 보석함을 구매해서 보냈다. 사진을 찍어 보냈더니 아들은 좋다고 하였다. 나는 작은 쪽지에 몇 자 안 되는 글을 써서 함께 보냈다. 엄마는 영어를 잘 못하니 네가 통역해서 친구 엄마에게 엄마가전 하는 마음을 잘 전 하라고 하였다.

  아들은 컬리지를 마치고 돌아올 때 하얀 운동화를 한 켤레를 가지고 왔다. 한국인 2세가 운영하는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미국에 오게 되면 꼭 다시 오라며 선물로 주었다고 하였다. 아들은 한국에 들어와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남은 공부를 위해 열심히 미국 유니벌스티를 목표로 준비하기 시작했다. 본인이 원 하는 두 개의 학교에 지원서를 냈다. 두 학 교 모두 합격 통지서가 왔다. 가정 경제는 도저히 보낼 수가 없었다. 코로나도 심한 시기였다. 나는 마음이 너무 아팠다. 이명증이 발생하고 불면증 왔다. 아들은 그동안 열심히 준비한 것들이 다 소용없게 되었다며 엉 엉 울었다. 전화기 너머로 들리던 아들의 울음소리를 잊을 수가 없다. 나는 아들 이름을 부르며 안타까이 천천히 말해 주었다. 소용없지 않아 그동안 모든 수고의 결과는 한순간 것이라도 다 너에게 플러스가 되고 훌륭한 이력이 될 것이라고~~ 나는 지금도 두 학교의 합격 통지서를 간직하고 있다.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저리다. 거의 1년여를 울었을 것이다. 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턴을 해 Ai  공부를 6개월 동안 했다. 학원에서  지도한 강사가 아들을 컨택해 현재 일하는 회사에 들어가게 되었다. 나는 아들에게 가끔 통화할  때  잘 있는지, 밥은 제때에 잘 챙기는지, 그리고 하는 일은 즐겁고 재미있는지를 꼭 확인한다. 이 말은  합격 통지서를 포기한 아들의 안정된 마음도 확인하고, 잠시 아들의 마음을 훔쳐 아픈 내 마음을 확인하고 위로하고 위안으로 삼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아들이 유학은 포기했지만 건강 관리 잘하면서 그 이상의 학력을 충족하기 바란다. 오늘도 아들을 위해  나는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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