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대전 문학관 시교실에서 수업연장으로 한국의 명산 지리산을 다녀왔다. 개인적으로 여러 정황상 결정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하지만 수업 날자에 계획된 여행으로 의미를 두고 결정하였다. 10월에도 교회행사로 지리산은 다녀왔다. 그때는 뱀사골을 거쳐 버스로 노고단을 오르기 위해 이마트 24시 편의점 아래, 주차장에서 하차했다. 노고단을 향해 오르던 중 비가 내려 중간에서 하산했다. 하산하던 중 운무가 차 내려올 때 참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운무에 묻혀 보기는 처음이었다.
이번 기행을 기획하고 앞에서 추진하는 분이 연락이 왔다. 버스 한 대 총좌석이 45인 석인데 현재 20석이라며 추가 인원을 모집해 달라고 하였다. 전 좌석을 채워야 개인이 부담하는 비용이 줄어드는 구조라 하였다. 열심히 추가로 5명을 모집하여 동행하기로 하였다. 그래도 좌석이 다 채위지지 않았다.
일주일 후 출발하는 날이 돌아왔다. 내가 모집한 동행인원을 챙기면서, 함께 버스를 오르기 위한 장소로 떠났다. 나와 함께 처음부터 동행하는 지인은 도자기 공방을 운영한다. 대전 문학관 근처에서 7시 50분 승차 공지가 있어, 다른 사람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월드컵 경기장 역에서 6시 18분 지하철을 타기로 했다. 처음으로 이른 시간에 지하철을 이용했다. 버스를 갈아타기도 하면서 좀 이른 시간에 관광차가 있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좌석을 채우기 위해 모집에 함께한 사람들도 모두 다 도착했다. 코끝이 차가운 아침이었다. 시간이 되어 차는 서서히 출발하였다.
이번 산행 순서는 삼성궁, 가수 김다현길, 평사리 최참판댁, 장편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문학관을 돌아, 저녁노을로 아름다운 성삼재를 올라가 보기로 했다. 그러나 시차를 놓쳐 아름 다운 노을은 보지 못하고 어두운 광경만 보았다. 패키지여행 시 시간을 잘 지켜야 계획된 여행지를 제대로 구경할 수 있는 것을 많이 느꼈다. 기획자가 가면서도 계속 공지를 하였는데 여러 명이다 보니 시간을 지키지 못했다. 그래도 불 평 하는 사람은 없었다. 자연히 시간이 늦어져 성삼재와 박경리 토지 문학관을 제대로 보지 못해서 아쉬웠다.
도자기 공방을 운영하는 지인은평시 흙을 가까이하고 자연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지리산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알려 주었다. 특히 삼성궁은 80년대부터 여러 번 다녀 갔다고 했다. 원주민들이 나가고 현재는 법인을 만들어 지자체에서 운영한다고 하였다.
삼성궁은 미술 학적으로 하늘, 산, 돌탑, 연못의 조화가 잘 디자인된 정원이라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는 삼성궁을 오르고 내리면서 얼마나 많은 세월을 이 정원을 위해 수고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하나하나 쌓아 올린 크고 작은 탑, 돌단, 마음의 고뇌, 소원의 대상이 되는 암각화들을 보면서, 사람은 태어날 때 축제지만, 일생을 살아가면서 각자가 감당하여야 만 할 삶, 크게는 나라 지킴이, 사회, 가정, 개인사, 마지막으로 누구도 함께 해 줄 수 없는 죽음이 두려워 돌 하나하나를 쌓으며, 소원을 빌었겠지 하는 생각을 했다. 각각의 암각화는 각각의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이곳에 쌓인 돌탑의 개수가 1500개라고 한다. 아래 사진들은 삼성궁에서 직접 찍기도 하고, 단톡에 올 라온 사진 들이다. 참 아름다운 풍경들이다. 높은 산속 연못에 물고들이 떼를 지어 헤엄 치는 모습이 보였다. 물고기 이름은 열목어라고 했다.
점심식사는 삼성궁을 돌아 내려와 예약된 대통밥으로 맛있게 먹었다.
지리산에서 나오는 산나물, 도토리묵, 부침개, 탁주등으로 한 상 차려졌다. 탁주를 마시지는 않아 맛은 어떤지 모르겠다.
시교실에는 일본 여성도 수강을 한다. 나는 우연히 일본 여성 세명과 함께 동석을 하였다. 결혼이주여성으로 한국에 온 지 36여 년이 되었다고 하였다. 나는 다문화 가정여성이나 자녀들을 케어하는 사람으로 여러 의미가 있는 점심식사 자리였다. 어떻게 결혼을 하게 되었는지, 그간 삶의 현장에서 어려움이나 불편감 해소 등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중에 시부모와의 관계, 자녀양육, 남편과의 관계이야기가 대부분 오고 갔다.
시부모님과의 관계는 연세가 많아서 일본 언어를 알고 있어 소통이 잘 되었다고 하였다. 지금도 된장을 재래식으로 담그고 장독에서 간장을 떠다 먹는다며 좋아했다. 한국 문화 적응에 시부모님의 은혜가 컸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다 보니 아직까지 부부 싸움도 없다고 하였다. 자녀 양육도 시부모님 도움 받아 잘했다고 하였다. 두 자녀가 분가해서 멀리 살아 아이들을 키우는데 도움을 주지 못해 안타깝다고 하였다. 자녀들에게 일본어를 교육시켰는지 물어보니, 학교 가면 일본 말이 무의식 중에라도 튀어나와 놀임을 염려해 가르치지 않았다고 하였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후회된다고 하였다. 한국으로 시집온다고 할 때, 친정어머니가 시 부모님에게 효도하라는 당부도 했다고 한다. 자녀도 다섯 명을 두었고, 시 부모님이 현재도 생존해 계시고, 손주들 사랑이 많다고 말해 주었다. 여행 중 백일장 대회에서 동석한 세명중 한 명의 일본 여성이 장원도 됐다.
아래 시는 내가 쓴 시다. 공통 주제는 탑이었다.
제목 (누구의 작품인가 ) 2024년 11월 19일 이임숙
저 돌 하나하나 이야기 담아 놓은 정성
어떤 마음 담았나
엄마 이야기 아버지 이야기
삐뚤 빼둘 토라진 돌
무슨 이야기 담겨있나
나 괴롭힌 오빠 미워
화풀이 한 돌
반듯하게 놓인 돌
어떤 이야기 들어 있나
내 손 잡고 놀아준
언니 이야기
저기 쌍둥이 돌
어떤 이야기 담고 올렸나
소꿉친구 헤어지기 아쉬맘 돌에 담아 올렸지
하얀 머리 되어 다시와
올 려진 돌 속 추억 그리다
옛날 얘기 하고 듣고 있다.
ㅎ ㅎ 성삼재 오르는 버스 안에서 진 시다.
점심 식사 후 미스트롯을 통해 알려진 가수 김다현길도 가보았다. 오래전부터 청학동 훈장 마을로 알려진 김봉건 씨의 딸이다. kbs 아침마당에서 많이 알려진 사람으로 기억된다. 처음에 나올 때는 머리를 길게 땋아 내리고 출연하다. 한동안 안보이더니 머리에 관을 쓰고 한복을 입고 나왔다. 조선시대의 관례대로 어른이 되었을 때 머리에 관을 쓰고 나왔던 것 같다. 세월이 많이 흘러 그 가정에는 세 자매가 있는데 김다현 가수가 세 번째 자녀인 것으로 안다. 그곳에서 시간이 좀 지체된 것 같다. 가게에 들어가 도자기도 보고 베트남산 계피도 구입한 사람들도 있다. 속에는 참깨와 견과류가 들어 있는 엿도 사고 다양한 물건들을 산 것으로 안다. 아래 사진이 김다현길에서 찍은 사진이다.
토지 문학관 오르는 길가에 대봉감과 단감가게가 많았다. 감 파는 한 여주인이 감을 맛 보라며 두 조각을 주었다. 감맛이 달고 참 맛이 좋았다. 오르막길 양 옆으로 감을 파는 가게, 기념품 가게, 예쁜 머플러, 밥상보, 등등, 다양한 물품들을 진열한 가게들이 정겨웠다. 예쁘게 수도 놓아지고, 컬러도 골고루 진열된 밥상보를 보고 있자니 냉장고가 없던 시골집 옛 부엌의 삼베천 밥 상보가 생각났다.
시간을 아끼며 빠른 걸음으로 최참판댁을 보고, 토지 문학관은 건물 밖만 보았다. 아래 사진은 박경리 토지 문학관표지석이다. 들어가는 입구왼쪽에 세워져 있다. 이 커다란 표지석을 보는 순간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생각났다. 겉모양은 같은 사람인데 사람마다 다르게 지닌 두뇌의 명석함, 생각이나 경험 그가 살아온 환경 등이 영향이 크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과연 표지석까지는 아니어도 내 이름 석자가 기억될 몇 사람만이라도 있을까? ㅎ ㅎ
안정되고 차분한 마음으로 돌아볼 수 없어 참 아쉬웠다. 토지에서 주인공으로 나왔던 최참판댁의 무남독녀 최서희가 생각났다. 그 시대의 배경 일제 순사들이 들이닥쳐 괴롭히는 장면, 돌림병이(전염병) 돌아 생명을 잃고, 고생하는 모습 등등이 떠 올랐다.
바깥 마당을 지나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펼쳐지는 그 시대의 가옥 구조, 생활에 필요한 생활 도구, 그중에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커다란 쌀 되지가 눈에 띄었다. 토지가 많으니 매 끼니 먹어야 할 식솔들도 많았을 것이다. 대문 밖 왼쪽 입구 큰 우물에서는 하루종일 어떤 일들이 이루어졌을까? 하는 마음으로 그 시대로 돌아가 마음대로 생각하며 그림을 그려 보기도 했다. 의복은 무명옷이고 주로 행랑채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많이 사용했겠지 어른 여성들은 하얀 적삼에 검정 치마를 입은 모습을 그려보았다. 버선 목이 종아리까지 올라오게 신고 귀밑 머리를 곱게 땋고 뒷머리에 매었던 빨간 댕기머리 어린 여종이 물동이를 머리에 인 모습도 그려보았다. 남성들은 하얀 광목 의복에 행전을 치고,
물 지게를 지고 양쪽에 매달 린 물통에 물을 가득 담아 발을 옮길 때마다, 출렁거려 밖으로 흘러나게 물을 깁는 모습도 그려 보았다, 빨래는 어디서 했을까? 건너편을 넘어다 보니 멀게 보이는 마을이 크게 보였다. 지금도 최참판댁과 연관된 사람들이 그곳에서 거주 중일까 하는 생각도 하면 서 걸음을 재촉했다.
홀 태를 보면서 부모님이 노랗게 영근 보리를 후리는 모습도 생각났다. 보리가 영글면 보리카락이 뾰족뾰족하게 길게 나와 있어 피부에 닿으면 붉게 알레르기도 일어나고 따가웠다. 보리알이 다 훌터지면 커다란 선풍구를 돌려 알곡과 쭉정이를 분리하고, 잘 건조해 방앗간에서 빻았다. 시대적 배경과 문명의 혜택을 비교하며 차이를 느끼게 하는 물품이었다. 시간 관계상 눈으로만 보고 돌아 나와야 했다. 비교적 원래의 물건들인지 확실한 건 모르지만 잘 보존된 것 같았다.
아래 사진들은 최참판댁에서
찍은 사진들이다.
반듯반듯하게 쌓인 뜰 돌이며 천장의 석가래, 기둥, 마루의 짜임들은 그 시대의 위세를 엿볼 수 있었다.
성삼재 저녁노을을 보기 위해 걸음을 재촉했어도 저녁노을은 보지 못했다.
아래 사진은 노을빛은 없지만 그 장소에서 일행들이 찍어 올린 시진들인 것 같다.
성삼재를 오르는 버스 안에서 시를 짓는데 구불구불한 길을 올라서인지 멀미가 났다.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그 맛이 좋은 감 영향인가 싶었다. 참 고생이 많았다. 24시 편의점 아래 바로 위로 아름다운 노을이 펼칠 곳은 어두움이 깔렸다. 아쉽지만 그래도 그곳에 이르러 어두운 풍경을 보고, 편의점 휴게소로 돌아와 추진한 분들이 준비한 맛있는 꿀 떡을 간식으로 먹고 차를 타고 내려왔다. 나는 속이 좋지 않아 떡 맛은 못 보았다. 성삼재 길에서 대전으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다른 길이 있는데, 운전자 분이 착각을 해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박정희 정부시절 고속도로를 처음 개발할 때 한국에 차도 많지 않은데 무슨 고속도로가 필요하냐며 시위도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 이렇게 그 먼 길을 당일로 갔다 올 수 있는 것은 고속도로가 있어서 가능하였다. 가을날 하루 해가 짧아 토지문학관과 성삼재 저녁노을을 제대로 살펴보지 못해 아쉬웠다.
그래도 좋은 사람들과 함께한 아름다운 추억이 될 여행이었다. 멀미하면서 흔들리는 맨 뒷좌석에 앉아 시도 써 보면서 말이다. 뒷좌석에 앉은 것은 일행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도자기공방을 운영하는 지인도 좋은 추억으로 남을 것 같다고 했다. 함께 한 사람들이 점잖고 조용하고 다음에 이런 기회가 주어지면 초대해 달라는 부탁도했다.